러시아 정교회(正敎會) : Russian Orthodox Church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동방정교회.
신도수는 2,500만~5,0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비잔티움의 그리스 선교사들이 러시아에 전파한 그리스도교는 988년 성 블라디미르 대공이 통치하는 키예프 공국의 국교가 되었다 (→ 색인 : 키예프 루스). 1037~1448년 러시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임명한 수도 대주교가 통치했는데, 키예프의 그리스인 수도 대주교가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사이에 일시적인 연합을 선언했던 피렌체 연합(1439)에 서명한 후 러시아 교회는 독립자치교회가 되었다. 모스크바의 수도 대주교 욥(Job)은 총대주교의 지위로 승격(1589)되어 콘스탄티노플․알렉산드리아․안티오크․예루살렘의 총대주교에 이어 서열 제5위에 오르게 되었다. 한편 우크라이나에서는 명목상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관할이었던 '키예프 및 전(全)러시아' 독립 수도 대주교구가 1458~1687년 폴란드 통치지역에 있었다. 1596년 다수의 우크라이나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로마 가톨릭과 연합했으나, 1687년 키예프 수도 대주교구가 모스크바 총대주교구에 재편입되고 19세기와 20세기에 폴란드가 분할되자 대부분 정교회로 되돌아왔다.

1721년 표트르 대제는 모스크바 총대주교구를 탄압해 국가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신성종무원(Holy Governing Synod)으로 대체했다. 총대주교구는 1917년 10월혁명으로 비로소 부활되었다. 1918~39년 러시아 정교회는 공산당의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1922년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을 받는 개혁운동의 일환인 갱신교회(Renovated Church)가 총대주교 티혼(Tikhon)의 교회에서 탈퇴하고, 신성종무원의 권력을 부활시키는 한편 성직자와 신도들을 분열시키자 러시아 정교회는 더욱 약해졌다 (→ 색인 : 갱신교회). 티혼이 죽은(1925) 뒤 정부는 총대주교 선거를 금지시켰다. 1927년 교회를 안정적으로 존속시키기 위해 수도 대주교 세르기우스는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충성'을 공식적으로 천명했으며 이후 일체의 정부 비판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처럼 정부에 '충성'하는 태도는 교회 자체 내에 보다 큰 분열을 가져왔다. 러시아 국내의 수많은 신도들이 세르기우스에 대해 반기를 들었으며, 국외에서는 미국과 서유럽의 러시아 수도 대주교들이 모스크바와 관계를 끊었다. 그러다가 1943년 스탈린 종교정책의 갑작스러운 전환 덕택에 러시아 정교회는 놀랄 만한 부흥을 이루었다. 새 총대주교가 선출되었고, 신학교들이 문을 열었으며, 수천 개의 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1945~59년에 비록 몇몇 성직자들이 체포․유배되기는 했으나 교회의 공식적 조직은 크게 확장되어, 문을 연 교회의 수가 2만 5,000개에 달했다. 그러나 1959~64년에 흐루시초프 치하에서 교회에 대한 새로운 탄압이 광범위하게 시행되어 문을 연 교회 및 교회 기구의 수가 1만 개 이하로 줄어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스크바 총대주교구는 소련 정부가 지지하는 평화운동을 비롯한 국제적인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다른 정교회들로부터 널리 승인을 받았으며, 이들과 모스크바 총대주교구 사이에 정기적인 상호방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48년 러시아 교회 독립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정교회 지도자 회의는 바티칸과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가 '미제국주의'와 결탁했다고 맹렬히 비난하면서 반서구적 입장을 채택했다. 이러한 입장은 스탈린이 죽은 뒤 수정되어 총대주교구가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했으며(196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도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했다. 이와 동시에 내부 불만의 소리도 높아져 갔는데 정부가 교구 성직자를 지방관료의 지배 아래에 두는 교구법령을 강요하자, 1965년 대주교 예르모겐과 사제 에슐리만․야쿠닌 등이 공공연히 항거한 것은 그 예라 할 수 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유럽의 난민들은 물론 미국, 일본, 만주 주교구(diocese) 등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러시아 정교회 지체들이 모교회(母敎會)와의 정기적 접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자신들의 러시아 소재 주교구를 떠나온 일군의 주교들은 유고슬라비아의 스렘스키카를로프치에 모여 명백하게 군주제를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을 채택했다. 그들은 더 나아가 '자유' 러시아 교회 전체를 대변하는 교회회의라고 자처했다. 오늘날까지도 상당수의 러시아 이민을 포함, 존속하고 있는 이들 단체는 1922년 총대주교 티혼에 의해 형식적으로 해체되었다. 티혼은 그후 총대주교 플라톤과 예블로기를 각각 미국과 유럽 교회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두 수도 대주교는 모두 카를로프치의 교회회의와 일정 관계를 유지해왔으나, 교회법적 권위를 가진 기구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1931년 플라톤과 예블로기는 모스크바의 수도 대주교 세르기우스로부터 소련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부했다. 플라톤은 미국에서 '임시 독립자치'를 선언했으며, 예블로기는 콘스탄티노플의 에큐메니칼 총대주교에 의해 승인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 총대주교구는 이들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970년 모스크바 총대주교구는 마침내 미국 정교회의 자치권을 승인하면서 미국과 캐나다에서 이전에 보유했던 교회법적 권리들을 포기했으며, 일본에 창설된 자치 교회도 같은 해에 인정했다.
(참고문헌)
1) 러시아정교회사 : N. 체르노프, 위거찬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1

2) The Russian Church Under the Soviet Regime, 1917-1982, 2 vol. : Dimitry Pospielovsky, 1984 Religious Mind, 2vol. : George P. Fedotov, 1946-66 (reissued 1975)

3) The Foreign Missions of the Russian Orthodox Church : Serge Bolshakoff, 1943

4) 러시아 정교회 (종교) Russian Orthodox Church

 

동방정교회의 규범

러시아 성가

러시아 연방의 종교

묵주기도

부활절 의식

역사

모스크바

모스크바파

역할

니콘

복고신앙파

티혼

포베도노스체프

표트르 1세

 

 

 

동방정교회

교회의 규범

동방 교회는 '독립' 교회들(Autocephalous churches), 즉 각각의 수장 주교의 치리(治理)를 받는 교회들의 협의체로 콘스탄티노플의 에큐메니컬 총대주교의 우위성은 칭호와 명예에 그친다 (→ 색인 : 동방자치교회). 현재 동방정교회에 속한 교회들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교회, 알렉산드리아 교회(이집트), 안티오크 교회(이 교회의 본부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있음), 예루살렘 교회, 러시아 교회, 그루지야 교회, 세르비아 교회, 루마니아 교회, 키프로스 교회, 그리스 교회, 알바니아 교회, 폴란드 교회, 체코슬로바키아 교회, 미국 교회 등이다.

또한 크레타, 핀란드, 일본에는 '자율적인' 교회들이 있다. 이 교회들은 모교회 관구에 교회법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독립 교회들을 언급하는 순서가 이 교회들의 실제적인 영향력이나 수적인 중요성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대 교회법이 인정한 대로 콘스탄티노플이 모든 교회의 으뜸이며 교회의 통일과 협력을 위한 상징과 수단이어야 한다는 합의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고대 교회법이 그렇게 인정한 까닭은 콘스탄티노플이 고대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정교회 내부에서는 많은 혼란과 행정상의 갈등이 있었다. 특히 서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는 관할권이 중복 설정되었으며, 정치적인 의욕이 지나쳐 명시된 교회법적 규약이 없는 교회 조직들이 형성되기도 했다.

동방정교회 > 교회조직 > 교회법

오늘날 정교회 조직의 항구적인 기준은 〈신약성서〉 이외에 처음 7차례 열린 에큐메니컬 공의회의 법령들(법규과 교령), 모든 교회가 그 권위를 인정한 몇몇 지방 공의회의 법령, 이른바 '사도 규준', '교부들의 규준'(교회법상 중요한, 탁월한 교회 지도자들의 발췌선집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색인 : 사도교회법).

주교직 (→ 색인 : 주교제도)

정교회에서는 교회를 여러 규준들 및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증언된 원리에 입각해 있다고 본다. 현대의 정교회 신학은 주교직이 성직 중에서 으뜸이며, 따라서 주교 자신이 관할하는 공동체(교구)에서 주교보다 더 높은 권위가 하느님에 의해 제정된 바 없다는 점도 강조한다. 그러나 지역 교회나 주교는 따로 고립된 채 살아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각각의 지역 공동체 생활은 현재와 과거에 다른 지역 교회들이 누려왔던 교회 생활과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동일성과 연속성은 주교 서품 의식에서 표현된다.

주교는 신앙의 보호자이며, 공동체의 성사를 집행하는 중심이다. 정교회는 사도권 계승 즉, 주교의 사역이 예수의 제자들의 사역과 직접적인 연속성을 가져야 한다는 교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연속성은 기능의 연속성이라기보다는 신앙의 연속성이다.

어떤 주교도 그의 동료들과 일치를 이루지 않고서는 즉, 주교공의회('주교회의')의 일원이 아니고서는 주교로 임명될 수도 자신의 소임을 다할 수도 없다 (→ 색인 : 시노드). 니케아 공의회(325, 이 공의회에서 결정된 법령들은 오늘날까지도 정교회에서 유효함) 이후, 로마 제국의 각 지역은 새로운 주교를 임명하는 완전히 독립된 단위였으며, 교회법상 최고 법정인 그 지방 고유의 주교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현대 정교회에서 이 기능은 각 독립 교회의 주교회 의장이 맡았으며, 일반적으로 ' 수도대주교'(metropolitan)라고 불렀다. 오늘날 이 기능은 ' 총대주교'(patriarch)라고 불리기도 하는 지방 수석대주교(local primate)가 수행한다. 그는 또한 대주교(archbishop:혹은 metropolitan)로 불리기도 하며 이 칭호는 영예로운 것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각 독립 교회 주교회의의 관할 지역은 국경선과 일치하며(중동 지역에는 예외가 많음), 서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지에 흩어져 있는 외국 정교회들은(디아스포라) 보통 모교회(母敎會)에 소속되며 그 주교회의의 지배를 받는다. 이 디아스포라들은 모교회의 권위 아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체제로 인해 정교회의 관할권이 교회법과 무관하게 중복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는 모두 인종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중세기에서 유래한 몇 가지 요인들(예를 들면 전례에서 모국어 사용)로 인해 오늘날 정교회 안에서 민족주의가 대두했다. 그 결과 민족 문화와 종교의 일체화도 나타나게 되었다. 민족 문화와 종교의 일체화는 정치적 조건이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의 생존을 돕는 때도 있었으나, 선교의 확장을 방해하고 교인들의 그리스도교적 일체감을 가로막기도 했다.

성직자와 평신도

정교회에서는 교회 생활의 기본 원칙으로서 영성체와 친교를 강조했기 때문에 성직주의(clericalism)가 발달하지 못했다. 평신도를 주교 선출에 참여하게 했던 초기 교회의 관행은 동방 교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위직 성직자들, 예컨대 사제들과 보제(補祭)들은 일반적으로 결혼한 남자이다 (→ 색인 : 수도회). 정교회의 현대 교회법은 한번만 결혼하고 배우자가 과부나 이혼녀가 아닐 것을 전제로 결혼한 남자에게 보제직 및 사제직 임명을 허용하고 있다. 이 규정은 절대적 일부일처제의 일반 원칙을 반영하는 것이고 정교회는 이 일반원칙을 사제직 지원자들이 엄격하게 준수해야 할 그리스도교적 규범으로 간주하고 있다. 보제와 사제는 서품을 받은 후에는 결혼할 수 없다 (→ 색인 : 독신).

주교들은 결혼하지 않은 성직자들이나 홀아비가 된 사제들 가운데서 선출된다. 결혼하지 않은 주교를 요구하는 규칙은 수사들이 성직 사회의 엘리트를 대표했던 6세기에 제정되었다. 오늘날 정교회에서는 수사의 수효가 줄었기 때문에 일부 지역 교회에서는 새로운 주교 후보자를 찾기 어렵게 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정교회의 평신도들은 최소한 부분적이나마 주교 선출에 참여하도록 허용되는 것 이외에도 교회 행정과 신학 교육에서 일익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에서는 거의 모든 직업 신학자들이 평신도들이고 평신도들이 설교자로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전례와 성사(聖事)

전례

전례의 역할

정교회의 예배는 신학적으로 풍부한 내용과 영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고 다양하기 때문에 정교회의 연속성과 일체성을 보장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이슬람교도들이 중동과 발칸 반도를 지배했던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에 종교적 지식과 경험의 유일한 원천이던 예배 때문이었다.

신자 회중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때 교회가 진정으로 존재한다는 개념은 동방 그리스도교인들 경험의 기본적인 표현이다. 이 개념이 없으면 주교가 전례에서 교사와 대사제로서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정교회 교회 구조의 기본적인 사항들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신성한 삶에 참여한다는 개인적인 경험도 공동체의 연속적인 예배 행동이라는 틀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권위있는 많은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동방 교회의 전례가 서방 교회의 전례보다 그리스도교 교회에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동방 교회의 전례가 항상 인간의 정서적․지적․미학적 능력에 동시에 호소하는 총체적인 경험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에는 매우 다양한 모델과 상징이 포함되어 있으며, 공식적인 신학적 진술과 신체적인 지각 및 몸짓(예컨대, 음악적인 분향, 부복 자세), 시각 예술이 포함된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을 교육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례에 참여하는 것은 전례의 모델에 친숙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델들 가운데 많은 것은 교회의 역사적․문화적 유산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정교한 고대 전례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교리 교육을 통해 신자들을 준비시켜야 한다. 그러나 정교회는 전례 문제에서는 항상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 결과 전례의 개혁은 신앙 그 자체의 개혁과 똑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전례의 주기

비잔틴 전례 전통의 주요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례상 연도(年度)의 다양한 주기를 특색짓는 찬송가 텍스트가 풍부하고 다채롭다는 점이다. 어떤 특별한 전례서에는 주요주기마다 찬송가가 수록되어 있다. 부활절 주간의 주기들은 1년 동안의 모든 의식(儀式)들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이 분명하며, 이것은 동방 교회가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이해함에 있어서 부활에 절대적인 중심을 두고 있음을 잘 예시해 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부활절의 날짜는 춘분 이후 첫번째 만월이 든 후 첫째 일요일이다.

6~9세기 비잔틴 교회는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처럼 뛰어난 시인들의 찬송가 저술로 작곡의 황금 시대를 구가했다. 근대에 들어와 찬송가 저술은 대체로 이전 시대 시인들이 수립한 양식을 따랐으나, 질적으로 이 모델들과 맞먹는 찬송가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성악은 언제나 카펠라(cappella)이며, 서구화한 미국 교구에서만 약간의 예외가 인정되고 있다.

 

성만찬 전례

정교회 예배에서는 2가지 성찬 전례가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른바 성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전례와 위대한 성 바실리우스의 전례가 그것이다. 이 두 전례는 9세기에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게 되었으나 위대한 성 바실리우스의 전례에서 사용되는 성찬 '규준'의 표현은 4세기에 성 바실리우스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성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와 성 바실리우스의 전례는 성찬 규준의 텍스트만 다를뿐 중세기에 확립된 전례의 전반적인 구조는 동일하다.

 

동방정교회

 

성사

현대 정교회 교리문답서들과 교본들은 모두 교회가 7성사(mysteria)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례, 견진, 성체, 신품, 고백, 성유(중세기 서방 교회의 '극단적인 도유 성사'), 결혼 성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성사에 관한 텍스트인 전례서(Euchologion:기도서)나 교부 전통은 공식적으로 성사의 수효를 제한하지 않는다. 또한 서방 교회에서는 성사(sacramentalia)로 부르는 예수공현 축일 때의 물의 축복, 장례식, 수사를 위한 체발식(剃髮式) 등 의식들과 '준성사'(sacraments)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는다.

동방정교회에서 각 성사 의식은 주교나 그 대리인이 인도하는 교회 공동체 전체의 기도이며, 이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으로 해석한다. 하느님의 응답은 교회에 성령을 보내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에 근거한다고 본다. 성사의 이 두 측면은 마술과 율법주의를 모두 배제한다. 여기에는 성령이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그들의 응답을 요청한다는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교회의 성사에서 하느님의 일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은 인간의 '협력'(cooperation) 또는 '공동 작업'(synergy)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참여로써 성 육신의 목표가 이루어진다.

세례 및 견진성사

세례는 보통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는 표지로서 세례 지망자들을 3번 물에 담그는 행위로 실시된다. 따라서 이 의식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받음을 표현한다. 세례 다음에 견진성사가 곧바로 이어진다. 견진성사는 사제가 새로 세례받은 그리스도교도에게 주교가 축복한 '성유'를 발라주는 의식이다. 세례와 견진을 받은 어린이들은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다.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은 세례 직후 어린이들에게 견진과 영성체를 허락함으로써, 세례를 성만찬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아야 하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해석하는 세례의 적극적인 의미를 견지하고 있다.

성체성사

동방 교회에서는 성체성사의 본질에 대한 사변이 발달하지 않았다 (→ 색인 : 성찬식). 기도의 정점(頂點)은 그리스도의 행위를 회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기원함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신비는 교회의 기도에 의해, 성령의 기원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신품성사

정교회는 보제직․사제직․주교직의 3가지 주요성직과 교사직․보좌보제직의 소직제를 인정한다(→ 색인 : 수도회, 성직임명식). 모든 직제의 임명은 주교가 성찬 전례 때 시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주교 임명은 교회법이 정한 주교회의에서 선출되어야 하며 최소한 2,3명 의 주교가 참가해야 한다.

고백성사

초기 교회의 고백성사는 장엄하고 공개적인 화해 의식이었다. 이 의식을 통해 출교된 죄인들이 교회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여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백 성사는 모든 그리스도교도의 교인으로서의 지위가 정기적으로 갱신되는 개인적인 고백 행위로 발전했다. 정교회의 의식에서 고백은 일반적으로 법률적 신문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치유로 간주되고 있다. 동방 교회가 서방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율법주의적이 아닌 것은 죄를 내적 욕정과 노예 상태로 해석하는 동방정교회의 교부(敎父)식 접근 태도 때문이다. 법률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은 외적인 범죄 행위뿐인데, 이 행위는 인간의 내적인 질병을 표출한 것이다.

성유성사

성유성사는 기도에 의한 치유의 한 형식이다. 그리스 교회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성 수요일 저녁에 온 회중을 위해 이 의식을 거행한다.

결혼성사

결혼은 장엄한 면류관 의식으로 거행되는데, 이는 하느님 나라에 성사로 '투사'(投射)된 영원한 결합을 상징한다. 결혼에 관한 정교회 신학은 법률적인 의미의 이혼불가성보다는 결혼의 성사적 영원성을 주장한다.


동방정교회

건축과 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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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 이래로 동방정교회는 다양한 교회 건축 양식을 발전시켜 왔다 (→ 색인 : 도상학). 주된 모델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6세기에 완성한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다. 이 성당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고전적인 바실리카 꼭대기에 거대한 돔을 세웠는데, 이는 하늘나라가 임재하는 것, 즉 성찬 의식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상징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현대 정교회 교회들에서 교회 본당과 성소를 분리하는 성상 칸막이는 상당히 후대에 발전된 것이다. 843년 성상파괴론에 맞서 정교회가 승리를 거둔 이후 성상의 항구적인 계시 역할이 새롭게 강조되었다 (→ 색인 : 성상파괴논쟁). 성상칸막이는 전례에서 제단 앞의 커튼을 여닫는 행위와 더불어 성찬 의식의 신비스럽고 '종말론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 신비가 '비밀'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찬 전례를 통해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을 때 이미 계시된 신성한 생명과 앞으로 올 '새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동방정교회는 이교적인 우상 숭배를 상기시키는 3차원적인 성상들 이외에도 풍부한 성화 전통을 발전시켰다.

 

휴대 가능한 성화들은 나무에 채색한 것이 많지만 에나멜 기법과 모자이크를 활용한 것도 있고, 언제나 가정이나 공공장소에 보관한다.

   

동방정교회

정교회와 그밖의 그리스도교

 

그리스 교회와 로마 교회가 분열한 때는 연대적으로 북유럽과 동유럽에서 선교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던 때와 일치한다. 그리스 교회와 로마 교회는 다같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의 팽창에 기여했으나 그 방법은 서로 달랐다. 서방 교회는 새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라틴어 전례를 따르도록 하여 라틴어를 그리스도교 문명의 유일한 매체가 되게 했고, 교회의 통일을 위한 주요수단으로 삼았다. 반면 동방 교회는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처음부터 성서와 전례를 개종한 민족의 모국어로 번역한다는 원칙을 채택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슬라브 민족들의 토착 문화와 통합되었고, 세계의 정교회는 중앙집중화한 기구라기보다는 민족 교회들의 친목단체로 발전했다.

 

피렌체 에큐메니컬 공의회(1439)가 실패한 이후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일치를 회복하려는 공식적인 노력은 없었다 (→ 색인 : 개신교). 그러나 영국성공회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는 특히 19세기 이래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교인과 신학자들이 중심이 된 몇몇 비공식 협의체는 동방정교회와 영국성공회의 '앵글로 가톨릭'파 사이의 상호 이해를 촉진시켰다. 그러나 정교회는 성공회의 신앙 내용에 관한 만족스러운 진술을 얻기 전까지 화해를 위한 공식적인 조치를 취하는 데 극히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정교회는 처음부터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했고, 그 대표들은 금세기초부터 실천과 관련된 '삶과 노동회의', 신학과 관련된 '신앙과 직제회의'에 참여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에큐메니컬 운동은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 회원 교회의 범위를 넘어 더 넓게 확대되었다. 공의회 정신 준수 원칙과 1960년대에 교황 파울루스(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간의 여러 차례 회의에서 교황이 동방정교회 총대주교와 동등한 자격으로 공식석상에 나선 것은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보다 깊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증명한 의미심장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를 분열시켰던 주요이유인, 교회가 다양한 사회적․정치적 정의 실현에 적극 참여할 것을 주장하는 서방 교회의 경향은 두 교회 간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동방정교회

교회․국가․사회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서방 교회는 다른 어떤 개별적 기구가 수행할 수 없는 사회 통합 기능을 떠맡았다 (→ 색인 : 교회와 국가). 그 결과 교황들은 그리스도교 국가의 사회 생활을 지배하는 권위를 공식적으로 부여받게 되었다. 동방에서는 제국 체제가 1453년까지, 러시아에서는 1917년까지 유지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는 제국의 정치적 틀 안에서 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개념은 약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교회의 이해관계와 국가의 이해관계를 동일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회와 제국이 모두 초자연적이고, 원칙적으로 우주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던 시기에 이 개념은 민족 국가에 신성한 지위를 부여하는 체제로 점차 발전했다 (→ 색인 : 황제교황주의). 오늘날 정교회 교회들 사이의 관계를 방해하는 현대의 교회 민족주의는 제국과 교회의 중세기적 동맹관계가 낳은 부산물이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정교회의 입장은 현대 에큐메니컬 운동에 뚜렷한 공헌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하느님에 대한 자족적인 지식, 세속화된 세상에서 그리스도교도의 참된 증인이 되도록 인도하는 것, 즉 하느님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으로 이해하는 합리적인 틀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도의 증언 형태는 매우 다양했고, 정교회는 전통적으로 은수자․정치가․수사․황제도 교회 성인에 포함시켜왔다.

 

정교회는 개인 또는 사회 윤리 분야의 구체적인 내용을 법전화하거나 체계화하는 일을 소홀히 해왔다. 정교회는 오히려 자유로운 인간의 양심을 신뢰한다. 그리스도교도 개개인은 〈신약성서〉와 성인의 위대한 본보기에 비추어 자신이 행동해야 할 바를 결정한다.

 

 

 

 

 

 

 

동방정교회 : 강태용, 익산, 1991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동방교회에 관한 교령(제2차 바티칸공의회문헌 해설 총서 2) : 레오 엘더스외, 현석호 역, 성바오로출판사, 1991

The Orthodox Church:Its Past and Its Role in the World Today, 3rd rev. ed. : John Meyendorff, 1981

The Eastern Orthodox Church, Its Thought and Life : Ernst Benz, 1963

The Orthodox Church : Timothy Ware(Kallistos Ware), 1963(reprinted with revisions, 1984)

The Byzantine Patriarchate, 451-1204, 2nd ed. rev. : George Every, 1962(reprinted 1980)

Eastern Christendom:A Study of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the Eastern Orthodox Church : Nicolas Zernov, 1961

The Eastern Schism : Steven Runciman, 1955(reprinted 1983)

 

러시아 성가(聖歌) : Russian chant

러시아 정교 교회의 단선율(單旋律) 예배 성가.

 

11~13세기까지의 악보 필사본들은 러시아 성가가 처음에는 비잔틴 성가의 가락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고교회(古敎會) 슬라브어의 강세 형태에 맞추어 사용했음을 암시한다. 이 시기의 러시아 필사본들은 ' 콘타키온'(kontakion)이라 하는 매우 화려한 비잔틴 성가와 그당시 비잔티움에서는 이미 사라진 복잡한 비잔틴 기보법을 담고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러므로 러시아 음악 자료들은 비잔틴 음악 및 기보법의 갈래를 재현하는 데 중요한 문서들이 될 수 있다.

 

14세기부터는 러시아 필사본에 나타난 기보법의 의미와 형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직 충분히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이무렵부터 러시아 고유의 요소들, 특히 민요가 러시아 교회음악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5세기말에는 기보(記譜)에 쓰이던 음악부호(znamya:즈마니아) 목록이 최초로 편찬되었다(즈나미아라는 용어는 znamenny 성가, 즉 '즈나미아 부호들을 따라 노래한다'는 개념을 낳았음). 그 목록들로 미루어 추정하건대 이미 당시에 전문용어들이 러시아어로 대체되어 있었고 그리스 용어들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에 이르면 러시아 성가는 그 원형이었던 비잔틴 성가와의 연관성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상태로 되고, 전체적인 선율도 변했다. 이때 비로소 최초로 러시아 성악가들과 작곡가들의 이름이 기록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어떤 작곡가들은 전통 가락들을 고쳐 작곡하기도 했다. 노브고로트 시는 16세기 후반의 중요한 음악중심지였다.

 

17세기에 러시아 음악가들은 서유럽 음악기법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러시아 황실은 18세기 예배음악의 주요중심지로서 당시 국제적인 양식으로 예배음악을 작곡하던 외국 음악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많은 러시아 젊은이들이 음악을 공부하러 이탈리아로 갔다. 19세기에는 독일의 영향이 두드러졌고 또한 많은 작곡가들이 러시아 교회음악에 개신교 코랄을 받아들였다.

 

이런 추세에 대한 반동으로 러시아 교회음악사 연구를 시작한 학자들은 몇몇 수도원에서 다성음악 도입에 반발하여 미미하게나마 그때까지 사용하고 있던 전통 가락들을 찾기 시작했다. 20세기초에 이러한 러시아 교회음악의 복원작업이 절정에 달했는데, 알렉산더 카스탈스키와 파벨 체스노코프의 작품들에서 그 예를 가장 잘 볼 수 있다. 이들은 다성 합창을 위한 곡들을 작곡하긴 했지만 옛 가락들을 써서 러시아 민속음악 양식과 조화시켰다.

 

러시아

종교

 

러시아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민족들은 각기 민족적 특성에 따라 오랜 시대에 걸쳐 종교적인 요소를 생활 속에 수용해 왔지만, 종교적 조직의 지위나 종교에 대한 각 민족들의 의식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양상을 달리해왔다. 소련의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실제적인 종교활동은 엄한 단속을 받았으며, 종교단체에 소속된 사람은 공산당에 가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 글라스노스트)과 함께 시작된 종교의 자유는 특히 소련이 해체된 이후 현실화되었으며, 많은 국민들이 여러 종교를 꾸준히 가져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사실상 새로이 부각되고 있는 러시아 민족주의는 러시아 정교를 러시아 문화의 주요요소로 재확인했다.

 

규모가 가장 큰 종교집단은 그리스도교의 분파인 러시아 정교이다. 그 기원은 대개 10세기가 끝날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때 슬라브 왕국인 키예프루시의 통치자가 비잔티움에서 건너온 전도사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며 그 이래로 1,000년의 세월 동안 러시아 민족의 주요종교로 자리를 지켜왔다. 이밖에도 17세기에 러시아 정교에서 갈라져 나와 20세기에 발달한 복고신앙주의, 침례교, 복음주의 단체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가톨릭교와 루터교는 소련의 다른 공화국에는 신자들이 많았으나 러시아에는 신자가 거의 없다.

로사리오(rosario) (영)rosary. ('장미화원'을 뜻하는 라틴어 rosarium에서 나온 말)

실에 꿴 묵주(염주)알이나 매듭의 골을 만지면서 기도문을 암송하는 종교적 행위.

넓은 의미에서 묵주나 매듭을 로사리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관행은 그리스도교․힌두교․불교․이슬람교 등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이 관행은 3세기 동방 그리스도 교회 수사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뒤 여러 형태의 묵주가 개발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공중 및 개인 기도를 할 때 흔히 묵주를 사용한다. 가장 흔한 묵주기도는 작은 묵주(chaplet), 즉 로사리오를 손으로 만지면서 암송하는 기도문인 성모 마리아의 묵주기도이다. 작은 묵주의 구슬들은 5개의 고리(decade:로사리오의 일부로서 작은 구슬 10개와 큰 구슬 1개로 되어 있음)로 되어 있는데, 각 고리는 큰 구슬로 다른 고리와 구분되어 있다. 작은 묵주의 양 끝은 십자가, 2개의 큰 구슬, 3개의 작은 구슬을 연결한 작은 끈으로 묶여 있다.

 

가장 많이 하는 묵주기도인 성모 마리아 묵주기도를 할 때는 작은 묵주를 3번 돌려야 한다. 이 묵주기도는 15단의 성모송(聖母誦)을 암송하게 되어 있는데, 각 성모송을 암송할 때는 작은 구슬을 잡고 있어야 한다. 각 단 맨 앞에 주기도문을 암송하고(이때는 큰 구슬을 잡음) 그 다음에 영광송(Gloria Patri:아버지께 영광이 있을지어다)을 암송하며 묵상과 기적(mystery)의 회상이 따른다. 15개의 기적은 예수와 마리아의 생애․죽음․영광과 관련된 사건들로, 이런 내용의 3편이 각기 5개의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묵주기도의 서두와 맺음말은 다양하다.

 

성모 마리아의 묵주기도문을 만든 사람은 13세기초 도미니쿠스 수도회 창설자 성 도미니쿠스로 여겨져왔으나 확실하지 않다. 이 묵주기도는 시편 암송이나 성무일도의 대용으로 문맹인 사이에서 점차로 발전된 듯하며, 이는 15세기 프랑스의 두에와 독일의 쾰른에 로사리오 봉사회(Rosary Confraternities)를 세운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 알람 드 라 로슈와 그의 동료들의 설교를 통해 정형화되었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는 묵주기도를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것을 거듭 권장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공식집회에서 묵주기도를 암송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동방 정교회의 경우 로사리오는 거의 수도원에서만 하는 기도형식이었다. 그리스와 터키의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콤볼로기온(작은 묵주)은 똑같은 크기의 구슬 100개로 이루어져 있다. 러시아 정교회의 베르티차(끈), 초트키(작은 묵주), 리예프스토카(사닥다리)는 모두 103개의 작은 구슬이 4개의 큰 구슬에 의해 불규칙하게 분리되어 있으며, 작은 구슬을 꿴 실들이 사닥다리 모양을 이루도록 서로 평행하게 연결되어 있다. 루마니아 교회에서는 작은 묵주를 마타니에(절)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루마니아의 수사들이 묵주알을 세면서 하는 기도의 시작과 끝에 매번 엄숙하게 절을 하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서 로사리오는 경건의 표현으로, 33개의 작은 구슬을 세면서 작은 묵주를 3번 돌릴 때까지 계속된다. 각 구슬은 〈코란〉에 있는 총 99개의 '가장 아름다운 알라의 이름' 가운데 하나를 상징한다.

부활절

종교적 의식

 

부활절 행사는 특정한 일요일에 거행하지만, 그 중요성은 사순절이라는 오랜 준비기간, 엄숙한 예식들이 행해지는 성주간(Holy Week), 그후 부활절 시기(Eastertide)로 알려진 오순절(성령강림 축일)까지 50일 동안 교회예배에서 강조된다. 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절기가 실린 교회력 전체가 부활절 날짜에 따라 짜여지고, 한 해의 예배를 위한 전례력도 부활절을 중심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부활절은 그리스도교에서 1년 중 가장 중심되는 절기이다. 전례서(典禮書)에는 부활절이 그리스도교 유월절(구속의 때)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예배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할 무렵(2세기) 주일성찬에 앞서 성서를 읽고 〈시편〉을 노래하는 전야예배를 보았다. 바로 여기서 부활절 전날 행하는 전야예배의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이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가 행하는 주목할 만한 부활절 축하행사로서 매주 행하다가 1년에 1번 부활절에만 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의 미사 경본에 나타나 있듯이 이 전야행사는 새로운 불의 강복(중세 초기 유럽에 도입된 관습), 부활절 촛불 점화, 예언이라고도 부르는 성구봉독, 세례반(洗禮盤) 강복, 세례, 부활절 미사 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양식은 초기의 것으로서, 그 주요행사로 볼 때 3~4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방교회의 전야예배는 토요일 저녁에 행해지다가 토요일 오후로, 중세 말엽에는 토요일 아침에 행하게 되었다. 1951년에는 선택적으로, 1955년에는 의무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 전체에서 부활절 전야예배는 오후 10시로 조정되어 현재 부활절 첫 미사는 한밤중에 시작한다 (→ 색인 : 부활전야).

 

부활절에 세례를 받는 것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몇 세기 동안 사순절 기간은 참회의 시간이었을 뿐 아니라 세례예비자들(catechumens)이 세례받을 준비를 하는 기간이었으며, 당시 세례는 1년에 1번, 즉 부활절에 받을 수 있었다. 부활절 전 6주 동안 세례예비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교육받았으며, 로마 가톨릭 미사경본의 사순절 전례서에는 지금도 이 관행에 대한 지침이 분명하게 보존되어 있다. 세례예비자들은 부활절 밤에 엄숙하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세례준비기간을 마무리한다. 부활절 밤에 세례반을 축복하는 긴 의식, 세례와 그 의미를 크게 강조하는 것, 이에 대한 많은 언급들이 지금도 부활절 예배에 여전히 행해지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방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는 교회가 매년 지키는 절기로서만이 아니라 교회의 예배 전체와 영적 삶의 핵심으로서 부활절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전야예배 전에 그리스도의 시체를 찾으려는 무익한 행위를 상징하는 행진이 교회 밖에서 벌어진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공포한 뒤 부활절 성찬을 행한다. 처음에 행렬이 교회를 출발할 때는 사방에 불을 전혀 밝히지 않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올 때는 수백 개의 촛불과 여러 가지 색채의 램프를 밝혀 그리스도 부활의 광휘를 보여준다.

 

성공회에서는 아침기도 때 성공회기도서의 특별 성가로 〈시편〉 95편(Venite)을 대신하고 있고, 루터교의 찬송집에는 부활절 예배순서가 실려 있으며 부활절에는 특별한 악절(樂節)을 사용한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공동전례집에는 부활절기도문이 실려 있고, 감리교의 〈거룩한 예배 Divine Worship〉에는 부활절 아침예배순서가 실려 있으나 이것을 꼭 사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교회에서 부활절 의식은 종려주일로부터 시작되는 성주간(고난주간) 동안 행해지는 일련의 예배의식의 절정을 이룬다. 성주간에 성찬식을 행하는 것이 관례지만, 다른 때에도 성찬식을 행한다. 많은 교파들이 '세족(洗足)목요일'(부활절 전 목요일,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긴 날)에 성찬식을 행하는 관습을 지켜왔으며, 또 어떤 교파는 부활절 아침 정규 예배시간 전에 성찬식을 갖기도 한다.

 

많은 개신교교회들이 성금요일에 초교파적 연합예배를 갖기도 하는데, 이 예배는 그 지역 목회자협회의 후원으로 이루어진다. 많은 교단에서 이 예배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7언(言)을 중심으로 정오에서 오후 3시까지 진행되며 참여한 교파의 성가대․성직자가 주관한다. 이러한 초교파적 예배는 부활절 새벽예배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미국에서는 이 예배를 텔레비전과 라디오로 중계할 정도로 관심이 높다. 이 일출(日出)예배의 기원은 알 수 없으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한 〈요한의 복음서〉 20장 1절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라는 구절에서 근거한 듯하다. 이 성서적 근거와 더불어 부활절 새벽예배는 죽음의 겨울에서 자연의 재생을 상징하는 봄의 새로운 탄생개념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부활절

널리 행해지고 있는 관습

 

그리스도교인들이 성주간과 성금요일로 이어지는 여러 예배의식의 절정으로 지키고 있는 부활절 의식에서 많은 민족적 풍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중에는 유럽인의 고대예식과 상징적 표현에서 전래된 것이 많으며, 부활이라는 주제와 관련있는 중동 이교도들의 봄의 축제들로부터 유래된 것도 있다. 이 풍습들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예를 들어 사순절 기간 동안 먹지 못하게 되어 있던 달걀이 이 의식에선 새 생명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 풍요의 상징이었고 후에 유럽에서도 역시 같은 상징으로 쓰였던 큰 산토끼가 북아메리카에 서식하지 않으므로, 그보다 작지만 인간의 풍요와 달의 주기(週期)를 상징하는 부활절 산토끼로 대체하여 준비한 달걀과 함께 둥지에 넣거나, 달걀을 멀리 감추어 아이들이 찾도록 하는 놀이가 부활절 풍습으로 이용된다.

 

니콘(Nikon), 본명은 Nikita Minin(1605 러시아 벨데마노포~1681. 8. 27(구력 8. 1) 모스크바 근처)
러시아의 종교 지도자.

니콘, 작자 미상의 초상화(1687)

러시아에서 국가에 대한 정교회 우위권을 확립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개혁을 일으켰으나 결국 교회 분열을 가져왔다 (→ 색인 : 러시아 정교회).

 

니콘(니키타)은 니주니노브고로트(지금의 고리키) 근처 벨데마노포 마을에서 핀족 계통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근처 수도원에서 기본교육을 받은 뒤 혼인을 하고 성직자가 되어 모스크바에 정착하여 살다가 그곳에서 세 아들을 모두 잃은 뒤 참회와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그후 1634~46년에 12년간 수도사․은둔자로 살다가 마침내 북부 여러 지역에서 대수도원장이 되었다. 1646년 수도원 일로 모스크바에 갔다가 어린 황제(tsar) 알렉세이와 총대주교 요시프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 모스크바 로마노프 가문의 묘지에 있는 노보스파스키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에 임명되었다.

 

니콘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황제의 고해신부 스테판 보니파티예프와 사제 이반 네로노프, 아바쿰 페트로비치(이들은 모두 니콘과 같은 니주니노브고로트 지역 태생임)가 이끄는 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사제들로 구성된 이 집단은 신자들과 더 가까이 접촉하여 교회에 생기를 불어넣으려 노력했으며, 전례서와 의식(儀式)에서 부수적인 오류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뒷받침으로 니콘은 노브고로트의 초대 수도대주교가 되었고(1648), 그 뒤에는 모스크바와 러시아 전체의 총대주교가 되었다(1652). 니콘은 교리와 의식 문제에만 권위를 행사한다는 조건으로 러시아 교회의 최고 성직자가 되었다. 1654년 황제는 폴란드 원정을 떠나면서 니콘에게 황제 자신의 가정의 안전뿐만 아니라 국가 행정을 관장해 줄 것을 부탁했으며, 1657년에는 폴란드와 새로운 전쟁이 터지자 그에게 완전한 주권을 위임했다. 황제와 우정을 나누고, 개혁자들의 뒷받침을 받으며, 모스크바 일반 대중의 공감을 얻는 등 니콘은 그의 생애의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니콘은 친구들과 멀어졌고, 자기와 일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잔인하게 다룸으로써 반대파들을 격노케 했다. 총대주교직을 수행하면서 총대주교구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참고하고 모스크바에 고용되어 있는 그리스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했으며, 많은 러시아의 전례서와 의식이 부패했을 뿐만아니라, 이들에 대한 보니파티예프 그룹의 개정도 새로운 부패를 가져왔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는 다른 정교회와 노선을 같이하기 위해서 러시아 전례서와 의식을 철저히 개정하여 그리스 정교회의 것과 같게 만들었다. 옛 친구들이 그 개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니콘은 그들을 추방해 버렸고, 그리스 및 키예프 수사들의 지지와 그리스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아 그다음 여러 가지 독자적인 개혁을 실행했다. 즉 교회에서 절하는 법을 바꾸었고, 십자가 성호를 그을 때 두 손가락을 사용하던 것을 세 손가락을 사용하도록 바꾸었으며, 모스크바 전승이 2번 할렐루야를 부르라고 정해놓은 경우에 3번 부르도록 명했다. 1654년에 열린 러시아 성직자 공의회는 그에게 전례서 개혁을 계속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다음 부정확하게 표현한 성상이라고 그가 생각한 것을 교회와 가정에서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점차 드세어지는 반발을 진압하기 위해 1656년에 또 1차례 공의회를 소집하고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파문했다.

 

니콘이 도입한 그 모든 변화들은 비록 종교의 외형에만 영향을 주었고, 그중 어떤 것들은 개혁이 오래가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일반 대중과 많은 성직자는 처음부터 그에게 반발했다. 교육받지 못한 러시아 성직자들은 법과 의식을 다시 배우기를 거부했고, 대다수의 신자는 러시아의 구원에 필수적이며 거룩하다고 생각해온 의식들을 니콘이 경멸하자 대단히 불안해 했다. 이것이 러시아 정교회 안에서 일어난 ' 라스콜'(Raskol) 혹은 대분열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니콘을 몰락시킨 주원인은 황제 가문과 강력한 보야르(대귀족) 가문들이 그에 대해 적대감을 품게 된 것이다. 그들은 니콘이 황제가 없는 동안 독단적인 태도로 권력을 행사한 것에 분개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교회가 국가 문제에 간섭할 수는 있으나 국가로부터 간섭은 받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을 반대했다.

 

1658년 알렉세이가 모스크바로 돌아왔을 때 황제와 총대주교 간의 관계는 더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자신감을 가질 만큼 힘이 커진데다 친척들과 신하들에게 선동되어 비록 총대주교와 공개적인 결별을 하지는 않았지만 더이상 그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았다. 니콘은 자기에게 모욕적인 행동을 한 귀족들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또한 자신이 집전하는 의식에 황제가 2번이나 참석하지 않자 마지막 조처를 취했다. 1658년 7월 20일(구력 7. 10) 크렘린 궁에 있는 성모승천(우스펜스키) 성당에 모인 회중들 앞에서 유난히 충동적인 방법으로 사직을 선포하고서, 곧 보스크레센스키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니콘은 평소 동정심이 많기로 유명한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서 자신을 다시 불러 이전의 영향력을 회복시켜 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몇 달 간의 자발적인 유배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화해하려 했으나, 황제는 그가 보낸 편지들에 답장을 해주지 않고 그가 이전에 선포한 사직을 정식으로 서면화하기를 촉구할 뿐이었다. 그러자 니콘은 자신이 사직한 것은 모스크바 주교구일 뿐이며 총대주교구는 아니라는 근거로 황제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는 8년 동안 러시아 교회에는 총대주교가 없었다. 니콘이 자신의 직위를 완강히 고집한 반면에, 알렉세이는 뚜렷한 선례가 없는데다 영원한 단죄를 두려워하여 공식적인 파면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1666년 11월 마침내 알렉세이는 이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서 안티오크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들이 참석하는 공의회를 소집했다. 황제는 니콘에 대한 고소장을 직접 작성했는데 그 내용은 그가 '대주재'의 칭호를 사칭했다는 주장을 포함하여 주로 황제가 모스크바에 없는 동안 그가 취한 행동에 관한 것으로 고소 내용의 상당 부분이 근거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성직자들은 군주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니콘에게 등을 돌려 이 군주의 편을 들었다. 그리스의 야심가 파이시오스 리가리디스(오늘날에는 그가 로마와 결탁했다고 알려져 있음)가 특히 니콘을 몰락시키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 공의회는 니콘에게서 모든 성직 직권을 박탈하고, 12월 23일에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직선 거리 560㎞ 가량 떨어져 있는 벨루제로의 수사로 추방했다. 그러나 그 공의회는 니콘이 도입한 바 있는 개혁들은 그대로 두었고,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그때로부터 복고전례파(復古典禮派) 또는 복고신앙파로 알려지게 된 사람들을 파문했다. 니콘은 말년에 황제와 관계가 좋아지게 되었다. 후임 황제 표도르 3세는 그를 유배지에서 불러들였으나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니콘은 러시아 정교회의 탁월한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유능한 행정가였다. 그가 궁극적으로 실패한 주요이유는 다음 2가지이다. 첫째, 그는 교회가 국가를 지배할 것을 고집했으나, 이것은 비잔틴이나 러시아 전통에 전례가 없었고, 어느 경우든 강요되어질 수 없었다. 둘째, 그의 고집스런 기질과 독재적 성향은 그와 접촉하던 사람들을 멀어지게 했고, 그의 반대파로 하여금 그에게 불명예를 안기고 결국 그를 파멸시키도록 하는 빌미를 주었다.

 

R. E. Pipes 글 | 李吉商 참조집필

1) Moscow and East Rome:A Political Study of the Relations of Church and State in Muscovite Russia : William-Kenneth Medlin, 1952(reprinted 1981)

2) Avvakum et les debuts du Raskol : Pierre Pascal, 1938(reissued 1969)

3) The Patriarch and the Tsar, 6 vol. : William Palmer, 1871-76

아바쿰 페트로비치 (Avvakum Petrovich : 1620/21 러시아 그리고로보~1682. 4. 14 푸스토체르스크)

 

러시아의 대주교, 복고 신앙파의 지도자.

 

보수적인 성직자였던 그는 러시아에서 순수하게 발전된 '옛 의식'을 지지함으로써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탈하여 러시아 교회사에 매우 심각한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는 근대 러시아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는 1652년 모스크바로 가서 총대주교 니콘에 대한 반대투쟁에 가담했다. 니콘은 전체 정교회를 통일하려는 노력으로 그리스 정교회를 받아들이는 개혁정책을 폈으나, 견해를 달리 하는 사람들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무자비하게 탄압해서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니콘의 치하에서 복고신앙파(Raskolnik:17세기에 전례개혁을 거부하여 러시아 정교회에서 분리된 보수적 일파)는 파문과 심한 박해를 당했다. 그도 2번이나 추방되었고 마지막에는 감옥에 갇혔다. 저서의 대부분은 푸스토체르스크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썼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책은 러시아 최초의 자서전인 〈인생 Zhitiye〉이다. 이 책은 표현이 생생하고 문체가 독창적이며 화려하여 초기 러시아 문학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1682년 복고 신앙파를 징계하기 위해 소집된 공의회는 아바쿰에게 화형 선고를 내렸고, 그 판결은 집행되었다.

알렉세이(Aleksey : (영)Alexis. 정식 이름은 Aleksey Mikhaylovich : 1629. 3. 19(구력 3. 9) 모스크바~1676. 2. 8(구력 1. 29) 모스크바)

 

러시아의 차르(1645~76 재위).

 

로마노프 왕가의 창시자 미하일 로마노프(1613~45 재위)의 아들이며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가정교사 보리스 이바노비치 모로조프에게 교육 받았으나 그리 깊이있는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그의 매부이기도 했던 모로조프는 처음에는 국정에 참여했으나 1648년 모스크바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알렉세이는 그를 추방해야만 했다. 알렉세이는 반란군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하고 젬스키 소보르(전국회의)를 소집했다. 젬스키 소보르는 1649년 새로운 러시아 법전(Sobornoye Ulozheniye)을 만들어냈으며 이 법전은 농노제를 합법적으로 규정했다. 궁정 총신으로서 모로조프의 뒤를 이어 N. I. 오도예프스키 공이, 그다음에는 총주교 니콘이 부상했다. 1654년 1월 러시아는 드네르프카자크족들에 대한 지배권을 받아들였고 이어 5월에는 폴란드와의 기나긴 전쟁에 들어갔다. 이 전쟁은 또한 스웨덴과의 분쟁(1656~61)도 수반했다. 폴란드와의 전쟁을 종결한 1667년 1월의 안드루소보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드네프르 강 동쪽에 위치한 스몰렌스크․키예프․우크라이나를 획득했다.

 

알렉세이의 통치 시기에 있었던 주목할 만한 일을 든다면 러시아 정교회의 분열이었다. 그는 수세기 동안 내려오면서 그리스적인 원형에서 이탈한 러시아 예배의식서와 실제 의식을 개혁하려던 니콘의 노력을 지지했다. 급한 성미와 권위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주위에 많은 적을 만들었던 니콘과는 오래 전에 사이가 벌어지긴 했지만 니콘이 주도한 개혁은 시행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파문당했다. 니콘이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후에는 A. L. 오르딘 나시초킨이 황제의 주요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1671년에는 A. S. 마트베예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알렉세이의 통치 시기에 농민은 토지와 영주에 예속된 존재였으며 이때문에 결국 농노로 전락하는 형편이었다. 전국회의는 점차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대신 전문 관료와 정규군이 중요한 위치로 부상했다. 알렉세이는 유럽과의 통상을 장려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받은 외국으로부터의 영향은 지금까지 러시아를 유럽의 이웃 나라들로부터 차단시켰던 상당히 견고한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통치에 대한 불만은 외국 세력과의 경제적인 경쟁에 시달리는 도시와 마지막 남은 자유의 흔적마저 박탈당한 농민층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의 정도는 빈번한 반란으로 표출되었는데 그중 가장 격렬했던 것은 1667~71년 동부 국경지대에서 일어난 스텐카 라진이 이끄는 농민반란이었다.

 

실제로 알렉세이가 온순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인기있는 통치자였다는 것은 모든 사료에 똑같이 나타난다. 러시아의 당시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는 박식했으며 서양의 기술․통상․문화․군사학 등에 깊이있고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의 커다란 결점은 몸이 허약하다는 것이었다. 이때문에 통치 전반에 걸쳐 나라일을 총신들에게 맡겼는데 이들 중에는 무능력하거나 완전한 멍청이들도 있었다. 그는 2번 결혼했는데 처음에는 마리아 일리니슈나 밀로슬라프스카야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2명의 아들과 몇 명의 딸을 낳았다. 두 아들은 후일 모두 황제가 된 표도르와 이반이었다. 그다음엔 나탈리아 키릴로프나 나리슈키나와 결혼했으며 그녀가 낳은 아들은 훗날 표트르 대제가 되었다.


복고신앙파(復古信仰派, Starover, (영)Old Believers : 러시아 정교회의 모스크바 총대주교인 니콘(1652~58 재위)의 전례개혁을 거부한 러시아 비국교도 집단)

 

17세기에 교인수가 수백만 명을 헤아렸던 이 집단은 여러 분파로 갈라져 그중 몇몇 분파만 오늘날에 남아 있다.

 

니콘 총대주교는 러시아에서 사용하는 전례서를 수정하는 데 필요한 권위있는 근거자료를 결정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다. 988년 루시족(러시아를 이룬 민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래 사용해온 전례서는 그리스어를 고대 슬라브어로 직역한 것이었다. 이 번역 필사본은 처음부터 부정확하고 모호했으며 여러 세기를 지나면서 필사자들의 실수로 내용이 빠진 경우도 있었다. '이상적인' 또는 '최초의' 본문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례를 개혁하기가 어려웠다. 총대주교 니콘이 채택한 대안은 그가 재위하기 시작한 1652년 당시 존재하던 그리스 교회의 전례서 본문과 의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그리스 본문에 따른 새로운 전례서를 인쇄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의식에서 그리스어와 그리스식 성직복을 사용하도록 하고, 십자가 성호를 긋는 방법도 바꾸어 두 손가락 대신 세 손가락을 사용하도록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의무로 부과된 이 개혁은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것으로 규정되었으며, 차르인 알렉세이 로마노프도 이를 도왔다.

 

니콘의 개혁조치에 대해 모스크바 사제들, 특히 대사제 아바쿰 페트로비치는 반대운동을 벌였다. 니콘이 차르의 권위에 너무 강하게 도전하여 직위를 박탈당한(1658) 뒤에도, 1666~67년 절정에 달했던 일련의 교회공의회는 니콘의 전례개혁을 공식 승인하고 반대파에게 저주를 선포했다. 그뒤 아바쿰을 포함한 수많은 반대파가 처형당했다. 때로 '라스콜니키'라고 불린 이 반대파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러시아 북부와 동부지역에(나중에는 모스크바에도) 주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 오지(奧地)를 식민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체의 변화를 거부한 이들은 표트르 1세가 도입한 서방식 개혁을 거부했고, 표트르를 적그리스도로 간주했다. 주교제도에 따른 성직체계를 갖고 있지 않던 이들은 두 집단으로 분열되었다. ' 포포브치'(사제 분파들)라고 하는 한 집단은 정규 사제들을 끌어모으려고 노력했고, 19세기에는 주교제도를 세울 수 있었다. ' 베츠포포브치'(사제를 두지 않는 분파들)라고 하는 다른 집단은 세례를 제외한 모든 성례와 사제를 배척했다. 이 두 집단에서 다른 많은 분파들이 생겼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지나치게 사치스런 의식을 시행했다.

 

복고신앙파는 관용령(1905. 4. 17) 덕분으로 대부분의 집단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겪으면서도 살아 남았다. '포포브치'와 '베츠포포브치' 두 집단에서 갈라져 나온 수많은 분파가 정식 등록하여 소련 정부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는 데 성공했다. '벨라야 크리니차'라는 모스크바에 중심을 둔 한 '포포브치' 집단의 교인수는 1970년대초에 80만 명을 헤아렸다. 그러나 시베리아, 우랄 산맥, 카자흐스탄, 알타이 산맥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복고신앙파 정착민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른 몇몇 분파는 아시아․브라질․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1971년 러시아 정교회 공의회는 17세기에 공포했던 모든 파문을 취소하고 옛 전례들을 완전히 승인했다.

티혼, Tikhon : 본명은 Vasily Ivanovich Belavin.

1865. 12. 31(구력 12. 19) 러시아 프스코프 근처 토로페츠~1925. 4. 7 모스크바.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지지한 인물이다. 처음에는 새 소비에트 정부의 반(反)교회 입법에 날카롭게 저항하면서, 본래 교회에서 이탈해나가 정부가 지원하는 정치지향적인 성직자 집단('살아 있는 교회'로 알려짐)에 협조하기를 거부했으나, 후에는 정부의 탄압을 줄여보려고 교회와 국가의 여러 관계에 유연한 자세를 취했으며, 확고하게 교회를 운영해 교회가 견딜 수 있는 상황을 마련했다.

 

러시아 정교회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1891년 수사가 된 뒤 정교회 전통에 따라 티혼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교회에서 빠른 출세 가도를 달려, 교수 생활을 마친 뒤 1897년 루블린(지금의 폴란드) 주교, 1898년 알래스카 주교가 되었으며, 1905~07년에는 북아메리카 정교회 주교로서 뉴욕 시에 머물렀다. 이러한 역량을 바탕으로 교회권력을 분산시키고 정교회 신학교들을 많이 세웠으며, 정교회 전례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도움으로써 러시아 정교회의 구조와 예배의식을 지역문화 환경에 맞추어 개정했다. 1907년 러시아로 돌아와 모스크바 근처 야로슬라블의 주교가 되었고 1917년 정교회를 재조직했으며, 1721년에는 차르 표트르 1세의 탄압으로 없어진 총대주교직을 되살리기 위해 열린 러시아 교회 총공의회에서 모스크바 수도대주교 겸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1917년 볼셰비키는 권력을 장악한 뒤 정교회의 토지재산을 모두 국유화하고, 정교회가 운영하는 모든 학교와 신학교를 인수하여 교회에 주던 모든 국가보조금을 중단하고 오직 세속 결혼식만을 허용했다. 1918년 정교회와 국가는 서로 완전히 등을 돌렸고, 교회는 이제까지 누려오던 법적인 권리들을 박탈당하면서 지역마다 사제들이 습격당하고 교회 재산이 노략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총대주교로서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도덕적인 권위를 행사하던 티혼은 처음에는 소비에트 정부의 행위를 단죄했으나, 1918~22년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에는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1921~22년 심한 가뭄이 발생한 상황에서 정부가 또다시 교회 재산을 몰수한 데 대해 완강히 반대했고, 이민한 성직자들과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모스크바 근교의 수도원에 감금당했으나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는데, 아마 영국의 정치적인 압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교회' 운동이 민중과 정부 모두에게 지지받지 못하자 1923년 6월에 풀려나 소비에트 체제의 적법성을 승인하고 혁명에 반대하는 모든 행위들을 단죄한다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한 뒤 제한된 행정활동을 허가받았다.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심한 정치적 박해 가운데서 '살아 있는 교회'파의 잔존세력들이 일으킨 내분을 해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갱신교회(更新敎會 : Obnovlencheskaya Tserkov, (영)Renovated Church)

여러 개혁파 교회들로 구성된 연맹.

 

이 연맹은 1922년 러시아 정교회의 중앙행정권을 장악하고 20년 이상 소련 내의 많은 종교단체들을 통제했다. 이 갱신교회라는 용어는 대체로 교회갱신운동을 뜻하는 말로 쓰였지만, 때로 소속집단 중 하나인 '살아 있는 교회운동'을 가리키기도 했다.

 

1917년 2월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 정교회는 그동안 수많은 성직자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으나 차르 체제 때문에 지연되었던 개혁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1917년 8월 1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교회회의는 표트르 대제가 폐지한 총대주교직을 부활시켰다. 새로 선출된 총대주교 티혼은 임시정부를 무너뜨린 공산당 정권에 대해서 비록 적대적이지는 않으나 완전한 독립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1922년 정부는 국가 전역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는 구실을 내세워서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한다는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고, 몰수된 일부 교회재산에 대해 총대주교가 관리권을 요구하자, 그를 가택연금하고 총대주교직을 폐지해버렸다.

 

교회에서 혁명을 일으킬 기회를 잡은 알렉산드르 베덴스키와 블라디미르 크라스니츠키를 앞세운 사제 집단은 임시고등교회집행부를 조직했는데, 이 조직은 총대주교를 폐위하고 급진적인 교회개혁을 단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운동을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시켰다. 이 임시집행부는 일부 주교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혼인한 성직자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이들은 교회법에 의해 주교 승진권을 박탈당했으며, 혼인을 하지 않은 수사들이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다. 그 운동은 또한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며, 정부도 그 편을 들었다. 몇 차례 계속된 공의회에서 갱신교회는 티혼을 폐위한 뒤 주교․사제․평신도로 구성된 성의회(Holy Synod)를 재구성했다. 이 성의회는 원래 1721년 표트르 대제가 총대주교직을 대신하여 교회를 지배하기 위해 만든 기구였으며 주교제도와 예배의식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운동은 교권을 장악한 사람들의 기만적인 성격 때문에 더럽혀지고 말았다. 즉 그들이 총대주교 및 그의 추종자들과 맞서 대결하는 동안 그 지도자들은 비밀경찰과 협력했고, 티혼 편에 섰던 수백 명의 성직자들이 반혁명주의자로 낙인찍혀 군인들에게 총살을 당했다.

 

총대주교는 반소비에트적인 행위를 한 데 대해 공개적으로 '자기비판'을 한 뒤 1923년 6월 25일에 풀려났다. 총대주교 편에 충실히 남아 있던 교회들에는 신도들이 많이 몰려들었으나, 갱신교회파는 그 입지를 많이 잃어버렸다. 갱신교회는 그뒤 여러 해 동안 주로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으면서 살아남았다. 1925년초 갱신교회측은 1만 7,650명의 사제와 1만 3,650개의 교회를 보유하고 있다고 발표했지만, 러시아 신자들 거의 대부분은 총대주교 교회에 충실히 남아 있었다. 갱신교회파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요시프 스탈린이 종교정책을 바꾸어 티혼의 계승자 선출을 허용함으로써 완전히 무너졌다. 베덴스키를 제외한 갱신교회 지도자들은 회개를 했고, 그 교회들은 총대주교의 권내로 돌아왔다.

 

포베도노스체프

Konstantin Petrovich Pobedonostsev

 

1827. 5. 21 러시아 모스크바~1907. 3. 23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의 공직자, 보수적인 정치철학자.

 

포베도노스체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와 그의 아들 니콜라이 2세의 가정교사 겸 고문으로 일했다. '대심문관'이라는 별칭을 얻은 그는 러시아 절대군주제의 상징이 되었다.

 

모스크바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교수를 지낸 러시아 정교회 사제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고 가정교육을 받다가 1841~4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올덴부르크 법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성인이 된 후로는 원로원 모스크바 사무실을 시작으로 러시아 관료기구의 중심부에서 평생을 보냈다. 여가 시간을 이용해 러시아의 민법과 관료제도의 역사에 관해 출판물을 발행했으며 이를 인정받아 1859년에는 모스크바대학교 민법강사로 초빙받았다. 그는 짜임새․학식․명료함으로 탁월한 강의를 선보여 1861년 알렉산드르 2세에게 매년 황제의 아들들이 모스크바에서 지낼 때마다 가정교사 역할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또한 1864년의 사법제도 개혁에도 크게 기여했다. 1865년 황제의 권유를 받아들여, 모스크바대학교와 원로원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황제의 아들과 그 가족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는 점차 알렉산드르 2세의 모든 개혁조치에 반대하게 되었으며 특히 법원개혁에는 더욱 반대했다. 알렉산드르 3세의 가정교사이며 가장 가까운 고문으로서 그는 알렉산드르 3세를 매우 보수적인 군주로 만들었다. 1868년 원로원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872년에는 국무협의회(고위자문기관)에, 그리고 1880년에는 러시아 정교회성의회의 최고행정직인 총재에 임명되어 1905년 가을까지 일했다. 이 직위로 그는 국내정치, 특히 종교․교육․검열과 관련된 문제에 관한 막강한 권력을 쥐었다.

 

그는 인간은 천성적으로 '나약하고 사악하고 가치 없고 반항적인' 존재라고 여겼다. 인간과 사회의 완전성을 믿는 18세기 계몽주의의 견해를 비난했으며 따라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부를 강력히 지지했다. 각 국가는 영토, 가족, 국민적 교회를 기초로 성립한다고 보았으며 정부의 주요목적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복고신앙파․침례교․가톨릭교․유대교 등 모든 경쟁 종교집단에 대항해 러시아와 러시아 정교회를 지키려고 했다. 또한 각종 소수민족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를 옹호했으며 이들 집단의 러시아화를 지지했다. 교회의 평신도 수장으로서 그는 종교를 강조하는 초등교육의 확산이야말로 독재정치의 보호막이 되어줄 것이라 보고 교구학교 내에 초등교육을 급속히 확산시켰다. 그는 사람들이 타고난 각자의 신분을 지키게 하고 고등교육은 상류계층이나 특별히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 국한시키려 했다. 또한 일체의 외국 영향, 특히 입헌민주정부에 관한 서유럽 사상을 금지․추방하려 했다. 그러므로 그는 종교적․인종적인 소수집단이나 서구지향적인 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한 억압정책을 실시한 장본인이었다.

 

1881년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된 직후부터 그는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 알렉산드르 3세를 설득, 정부와 사회지도층 간의 틈을 좁히기 위한 이른바 로리스-멜리코프 헌법을 거부하도록 만들었다. 1880년대 내내 정부의 보수적 국내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나 죽기 전 15년 동안에는 별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생전에는 체제비판자들에 의해, 그리고 이후에는 역사가들에 의해 크게 과장되었다. 그 이유는 주로 그의 인간성이나 외모, 겉으로 드러난 견해 등이 러시아 지식인․자유주의자․급진주의자들 사이에 큰 불만이던 통치체제의 상징과 절묘하게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식이 없었고 무미건조하며 내성적인 성격으로 1881년에 죽은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제외하고는 가까운 친구도 거의 없는 매우 염세적인 금욕주의자였다. 반면에 상당한 학문과 학식을 지녀 외국 외교관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는 대부분의 유럽 언어들을 구사할 줄 알았으며, 비록 러시아인들에 대해서는 검열과 엄격한 통제를 강력히 주장했지만 자신은 유럽이나 미국의 방대한 문학과 철학을 광범위하게 접했다. 특히 1890년 이후에는 러시아 정권이 혁명에 의해 타도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입헌 민주정부, 언론과 종교의 자유, 배심원 재판, 무상 세속교육 등에 관해 그가 품은 깊은 증오심과 두려움은 1896년에 출판된 평론집 〈모스크바 선집 Moskovskyy sbornik〉에 잘 나타나 있다.

 

R. F. Byrnes 글

알렉산드르 3세

 

 

 

── 三世

 

Aleksandr Ⅲ

 

(영)Alexander Ⅲ. 정식 이름은 Aleksandr Aleksandrovich

1845. 3. 10(구력 2. 26)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1894. 11. 1(구력 10. 20) 크림 리바디야.

 

러시아의 황제(1881~94 재위).

 

대의정부에 반대했으며 러시아 민족주의를 지지했다. 러시아 정교회와 전제정치 및 '민족성'(narodnost:러시아 민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제국 안에 있는 소수민족을 러시아화하고, 정교를 믿지 않는 종교 집단을 박해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알렉산드르 3세는 알렉산드르 2세와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상냥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버지를 거의 닮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교양있고 용감하지만 복잡한 큰할아버지 알렉산드르 1세를 닮은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는 군주로서 일반 민중과 똑같이 거친 기질을 갖고 있었고 이 점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의 솔직한 태도는 이따금 거칠고 우락부락한 인상을 풍겼지만 자신을 꾸밈없이 표현하는 방식은 투박하고 고집스러운 용모와 잘 어울렸다. 태어난 뒤 20년 동안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으므로 당시의 대공이 받는 형식적인 훈련밖에 받지 못했다. 이 훈련은 초등 및 중등 교육의 수준을 별로 넘어서지 못했는데 프랑스어․영어․독일어 교육 약간과 군사 훈련이 포함되었다. 1865년에 형 니콜라이의 죽음으로 러시아 황태자가 되자 비로소 법률가이자 정치철학자인 K.P. 포베도노스체프한테서 법률과 행정의 원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포베도노스체프는 알렉산드르에게 대의정부에 대한 증오심을 일으키고, 러시아 황제는 누구나 러시아 정교회를 열렬히 신봉해야 한다는 믿음을 심어 줌으로써, 그의 통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형 니콜라이는 죽을 때 약혼녀인 덴마크 공주 다그마르를 후임 황태자와 결혼시켜 달라고 유언했다. 다그마르 공주는 그때부터 마리야 표도로브나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황태자 시절(1865~81) 알렉산드르는 그의 사상 가운데 일부가 당시 정부의 원칙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는 외국의 부당한 간섭, 특히 독일의 영향력에 반대했다. 그러나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슬라브주의자들의 허세를 종종 조롱했으며, 프로이센과의 동맹을 외교정책의 토대로 삼았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대립이 처음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때였다. 이때 황제는 프로이센에 동조했고 황태자는 프랑스에 동조했다. 이런 대립은 오스만 제국의 해체가 유럽의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1875~79년에도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황태자는 정부보다 더 슬라브주의적이었으나 1877~78년에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침공군의 좌측 부대를 지휘하는 동안 환상에 깨어났다. 그는 양식있는 지휘관이었지만, 러시아가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얻은 성과의 대부분을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재한 베를린 회의에서 도로 빼앗기자 분개했다. 더욱이 비스마르크는 그 직후에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 동맹의 목적은 분명 러시아의 동유럽 게획을 방해하려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동맹을 맺은 사실은 1887년까지 러시아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렉산드르 황태자는 러시아 육군과 해군을 과감하게 개편해 미래의 뜻하지 않은 사건에 대비하는 것이 러시아가 해야 할 최선의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881년 3월 13일(구력 3. 1)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고 이튿날 독재 권력은 그의 아들에게 넘어갔다. 통치 말년에 알렉산드르 2세는 니힐리스트들이 꾸미는 수많은 음모때문에 심한 불안에 시달렸다. 암살당하던 날, 그는 많은 자문위원회를 신설하는 법령에 서명했는데 이 자문위원회가 나중에 대의기구로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새로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 3세는 발표되기 전에 이 칙령을 취소했고 그의 즉위 선언문에서 자신이 물려받은 독재 권력을 제한할 의도가 조금도 없다고 천명했다. 그가 시작한 내정개혁은 모두 그때까지의 지나친 자유주의 경향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러시아를 무정부 상태의 혼란과 혁명적 동요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서유럽의 의회제도와 이른바 자유주의가 아니라, 러시아 정교회와 전제정치 및 '민족성'이라는 3가지 원칙이었다.

알렉산드르의 정치적 이상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언어, 하나의 종교, 그리고 하나의 정부형태를 갖는 국가였다. 그는 자신의 영토에 거주하는 독일인과 폴란드인 및 핀란드인에게 러시아어를 쓰게 하고 러시아 학교에 다니도록 강요했다. 한편 다른 신앙을 억압하는 반면 러시아 정교회를 육성했고 유대인을 박해했으며 변두리 지역에 남아 있는 독일과 폴란드 및 스웨덴의 제도적 잔재를 일소함으로써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른 지방에서는 ' 젬스트보'(선거로 구성되는 지방 정부)를 무력하게 만들고, 농민 공동체의 자치정부는 중앙정부가 임명하는 지주의 감독을 받게 했다. 동시에 그는 제국 정부를 강화하고 중앙집권화하고자 애썼으며, 정부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통제력을 더욱 강화하려고 했다. 외교에서는 단호한 평화주의자였지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평화의 원칙을 지키는 열렬한 평화 지지자는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행동에 분개했지만 독일과 공공연히 불화를 일으키는 것은 피했고, 한때는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 통치자들이 맺은 삼제동맹을 되살리기까지 했다. 알렉산드르가 독일에 대해 좀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통치 말년, 특히 1888년 빌헬름 2세가 독일 황제에 즉위한 뒤부터였다. 1890년에 러시아와 독일의 동맹이 끝나자, 알렉산드르는 혁명의 온상이라며 싫어하던 프랑스와 마지못해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중앙 아시아 문제에서는 영국과의 갈등을 피하면서 러시아의 지배를 확대해나간다는 전통적인 정책을 고수했고, 모험적인 강경파들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도록 용납하지 않았다.

대체로 알렉산드르의 통치 기간을 러시아 역사에서 중대한 시기의 하나로 볼 수는 없지만, 가혹하고 비정한 통치가 이루어진 그의 시대에 러시아가 어느 정도 진보했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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