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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vgeny Ivanovich Zamyatin( or Zamiatin)

 1. 서론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은 1884년 2월 1일(구력 1월 20일), 러시아의 탐보프 레베쟌에서 태어났고, 1937년 3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자먀찐은 컴퓨터가 인간을 지배하고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21세기 현대사회에서 '이성', '합리', '규칙'이라는 고전적 틀에 갇혀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는 러시아 작가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혁명 이후 세대 가운데 재능이 뛰어나고 교양 있는 인물로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근대문학 장르인 반(反)유토피아 소설을 창시했다. 실험적 문장가이자 유럽 지성의 세계주의적 휴머니즘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러시아정교회 목사인 부친과 피아니스트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902년 뻬쩨르부르그 종합기술대학에 입학하여 수학 중 볼쉐비키 당에 가담하여 일련의 정치활동을 하였다. 1908년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학과 교수로 임명된 그는 신사실주의 경향이 농후한 <<어느 지방의 이야기(1913)>>와 <<땅 끝에서(1914)>>를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땅 끝에서>>는 짜르의 검열관들에게 비난을 받아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방면되긴 했어도 얼마 동안은 글을 쓰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영국에서 러시아 쇄빙선 건조를 감독하면서 인색하고 감정이 억제된 영국식 생활을 풍자한 <<섬 사람들>>(1918)을 썼으며, 1917년에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이 작품의 통렬한 사실적 묘사를 비난하며 소송을 제기하여 그를 재판에 회부하기도 하였다.

1917년 11월 볼쉐비키 혁명이 발발하자 자먀찐은 사회주의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작가의 반열에 서서 활발히 문단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소비에트 예술정책과 자신의 문학관이 서로 상충된다는 것을 깨닫고 실의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가로막는 그 어떤 장애물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자먀찐에게 소비에트 정권은 단지 인간성을 파괴하는 또 다른 형태의 짜르 체제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던 것이다. 자먀찐은 창작 과정에서 한치의 오차도 인정하지 않는 무결점의 글을 쓰려고 부단히 노력한 작가였다. 문학 형식은 마치 물리학처럼 완벽한 법칙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집필과정에서 목적이 분명한 어휘를 선택하였으며, 문학 장치와 문학적 기교를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고 절제와 조화라는 원칙을 철저히 준수하였다. 이러한 독특한 그의 문학관 형성은 이공계 교수라는 직업과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그는 합리, 논리, 그리고 과학적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으나, 이와는 정반대로 기계는 꿈도 꿀 수 없는 몽상과 불합리를 선호하는 성향이 농후했고,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갈망과 욕망을 찬양하는, 다시 말해 인간의 자유와 개인주의의 낭만성에 강한 애착을 가졌던 작가였다.

1921년에 형성된 문학단체 '세라피온 형제'와의 논쟁에서 그는 자신의 문학관은 '나는 두렵다'라는 에세이를 통해 공포하였다. "진정한 문학은 근면하고 성실한 마치 기계와 같은 관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치광이, 은둔자, 이단, 몽상가, 반역자들에 의해서만 존립할 수 있다" 기존의 확고한 원칙을 걸고 넘어지는 이단의 필요성, 공식적인 교리에 대한 정면도전, 실수와 실패를 유발하는 믿음이 고정적인 진리보다 우선한다는 주장 등을 내세웠던 것이다.

최대의 야심작인 장편소설 <<우리들>>(1924)은 필사본으로 유포되었으며 러시아에서는 출판하지 못했다(1924년 영역본이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1927년 러시아어 원본이 프라하에서 출판되었음). 이 작품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1932)와 조지 오웰의 <<1984>>(1949)와 같은 작품의 효시이다.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마마이>>와 <<동굴>>은 1920년에 집필된 단편으로, <<우리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소설들도 막시스트적 낙관주의와 역사의 진보라는 독트린을 거부한다. 이 단편들로 자먀찐은 반소비에트 작가라는 평판을 굳히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들을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쓴 정치적인 작품으로 편협하게 평가하는 것은 적합지 못하다. 자먀찐에게도 러시아의 급진적인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열정으로 활동에 동참하던 혁명적 정열이 있었다. 예술가로서 자먀찐은 혁명을 무정부적이고 보헤미안적 개념으로 받아들이길 고집했고, 볼쉐비즘의 도그마의 한 징조로 소비에트 내에서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입을 거부했다. 1920년대에 쓴 몇몇 에세이와 소논문들에서 그는 예술가는 국가에 봉사해야 하며, 소비에트 내에서의 사회주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요구에 이의를 제기했다. 자먀찐은 당시 당노선을 따르는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공격하면서, 진정한 문학은 반드시 상징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당연히 예술적으로 실현된 철학이어야 하며, 예술가는 날마다의 사건들의 연속을 극복해야 하며, 존재의 진실을 다루어야 한다고 자먀찐은 생각했다. 또한 이 두 작품의 기본 설정은 혁명직후 러시아의 혹독한 상황 하에서 전통적인 가치와 문명화된 행동의 유지의 어려움에 있다. 자먀찐은 시간의 설정을 회귀된 역사로, 뻬쩨르부르그라는 공간의 설정을 기존의 뻬쩨르부르그 신화 위에 덧씌워진 신화화된 낯선 공간으로 치환시킴으로써 당시의 생활상을 상징적이고도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이 두 작품의 인물들을 분석하면서 예브게니 자먀찐의 혁명 후 시기 산문의 특징들인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공간적, 시간적 상징과 이미지, 고도의 생략된 어투 등이 어떻게 작품에 나타나있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2. 본론

 

1) 동굴

 

빙하, 맘모스, 황야, 어딘지 집과 비슷한 밤중의 까만 바위, 그 바위 속에 동굴이 있다. <...>허나 분명한 것은 지금이 겨울이라는 것이다. 추위 때문에 이가 덜덜 떨게 하지 않으려고 이를 꽉 물고 있어야 하며, 돌도끼로 나무를 베어야만 하고, 밤마다 동굴에서 동굴로 더 깊숙이 자신의 모닥불을 옮겨야 한다. 그리고 털 짐승과 모피를 더 많이 껴 입어야 한다. 한세기 전 뻬쩨르부르그라는 도시가 있었던 바위사이의 밤에는 맘모스가 돌아다니고 있다.

 

한 세기 전에 뻬쩨르부르그가 있었던 곳, 현재의 시간은 빙하와 맘모스가 있는 원시시대로 회귀되어 있다. 계절적 배경은 겨울이며, 공간적 배경은 뻬쩨르부르그라는 도시가 있었던 자리이다. 그래서 동굴 속에는 원시적인 것과 도시적인 것- 짐승가죽과 외투, 담요가 공존한다. 이 작품의 배경은 결국 겨울로 대표되는 삶을 위협하는 현실조건과 동굴이라는 공간으로서의 혁명 이후의 뻬쩨르부르그, 그리고 동굴의 주민들로 상징되는 뻬쩨르부르그의 사람들이다. 이러한 배경설정은 혁명 이후의 러시아는 원시적인 과거로 회귀한 모습이라는 작가의 설정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주인공 마르틴 마르티느이치는 서재를 못질하고 침실로 숨는다. 그들은 더 이상 어떤 곳으로 도피할 수 없다. 더 이상 도피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그들의 주거지인 동굴은 노아의 방주라는 상징으로 표현된다. 성서적인 의미에서의 방주는 모든 것을 멸망시키는 신의 섭리 수단인 홍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생존공간이다. 즉 노아의 방주는 홍수로 대체되는 혁명과, 혁명 이후 표류하고 있는 생존공간으로서 상징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동굴 안에는 동굴에서의 생존을 가능케 해주는 난로가 자리 잡고 있다. 동굴의 신으로 표현되는 난로는 동굴 주민에게 온기와 생명을 담보로 끝없는 경배를 요구하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한 신이다. 난로의 신은 경배의 보답으로 위대한 불의 기적을 베푼다. 그러면 동굴 속에도 한 순간 봄이 싹트는 것이다. 난로는 동굴 사람들의 생존 여부를 담보로 그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난로는 하나의 사회, 혹은 인간의 안락한 삶을 허락하는 한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절대자의 존재이다. 불의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난로의 신은 당시 사회에서 깨어질 수 없는 소련의 이데올로기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들어 낸 난로가 인간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신으로 숭배되어야만 한다는 것과 그 신을 숭배하기 위하여 피의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삶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은 인간 위에 물질이 군림하게 변질된 소련의 정치 형태를 풍자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장작을 필요로 하는 주철난로라는 신은 혁명 전후, 무수한 혁명 공약들을 내세웠던 당국이, 이제는 새로운 형태의 숭배를 강요한 소련의 모순을 보여준다.

이러한 동굴 속에서 마르틴의 병약한 아내 마샤는 명명일을 맞는다. 명명일이라는 인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그들에게는 장작이 필요하다.

 

또 다른 조각의 마르틴 마르티느이치는 방으로 날아든 자유로운 새처럼 어리둥절해서, 맹목적으로 천장에, 유리창에, 벽에 부딪혔다. ‘어디에서 장작을..어디에서 장작을..어디에서 장작을‘

한 마리의 자유로운 새로 상징되는 마르틴은 마샤에게 장작이 있다고 거짓말 하고 어디에서 구할지 고민한다. 이제부터 마르틴은 장작이라는 물질적인 소욕을 찾기 위해 정신적인 소욕과의 투쟁을 시작한다. 이 투쟁 속에서 마르틴은 두개의 마르틴으로 분열되며, 이 분열은 그의 반복되는 말로서 묘사된다. 장작을 구하기 위해 그는 알렉세이 이바느이치 오베르뜨이쉐프를 찾아간다. 주인공 마르틴 마르티느이치와 비교하여 오베르뜨이쉐프에게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찾아 낼 수가 있다.

 

오랫동안 수염을 깎지 않은 그의 얼굴은 마치 불그레한 먼지를 뒤집어 쓴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 같았다. 그 잡초 사이에 누런 돌과 같은 이빨이 보이고 도마뱀의 꼬리와 같은 미소가 언뜻 엿보였다. <...> 식당에는 오베르뜨이쉐프의 암컷과 세 마리의 새끼들이 있었다. 암컷은 황급히 수프 접시를 냅킨 밑으로 감추었다. 다른 동굴에서 사람이 온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된 오베르뜨이쉐프의 외형 묘사를 통하여 볼 때, 오베르뜨이쉐프는 문명화된 인간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원시시대의 동물적인 모습이다. 또한 그의 아내를 묘사하는 단어 자체도 самка 암컷이라는 표현이며, 그의 세 아이들도 трое обертышат이라는 세 마리의 오베르뜨이쉐프의 새끼라는 동물을 부르는 표현으로 묘사함으로서, 오베르뜨이쉐프와 그의 가족에게 인간성을 박탈하고 동물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오베르뜨이쉐프는 혁명 직후 소련 사회에 ‘장작’으로 나타나는 부를 소유한 특권계층을 묘사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장작’을 통하여 난로의 신을 숭배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그런 신의 영역 안에서 탐욕스럽고 게걸스럽게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해가려는 혁명의 과정 속에서 이미 혁명의 맹목성을 먼저 알고 그 타성에 젖어버린 소련 사회의 이중적인 계층을 바라보는 작가의 부정적인 묘사로 볼 수 있다.

 

как жена? как жена? как жена?

Кто там? Кто там? Кто там?

 

오베르뜨이쉐프의 말은 메아리로 들린다. 이는 동굴에서 울려 퍼지며 되풀이되는 메아리로 인식됨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목소리의 반복은 텅 빈 동굴세계에서 잘 적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음과 동시에 이러한 비참한 현실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암시를 나타내주고 있다.

 

거의 숨이 멈출 것 같은 순간에 두 명의 마르틴 마르티느이치는 생사의 투쟁을 하고 있다. 스크랴빈을 알고 있는 옛날의 마르틴 마르티느이치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동굴의 마르틴 마르티느이치는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동굴의 마르틴 마르티느이치가 이빨을 갈면서 옛날의 마르틴 마르티느이치를 짓밟고 질식시켜 죽이고 말았다.

현실과의 타협으로 장작을 훔치게 된 주인공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는 문단으로, 대립되는 자아 속에 과거의 마르틴이 동굴의 마르틴에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은 주인공이 있는 현실의 비참함을 보여주고 있다.

장작을 훔쳐 돌아온 마르틴은 마샤와 과거를 회상하면서 아련히 떠오르는 행복을 이야기 한다. 그럴 때 그녀의 목소리는 ‘예전의 마샤의 목소리’를 되찾는다. 현실의 이야기를 할때의 마샤의 목소리는 ‘유리를 긁는듯한’ 목소리를 낸다. 이러한 대비적인 묘사는 현실의 어려움을 과거와 비교하여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 작품에는 음악이 라이트 모티프로서 존재한다. 스크랴빈 75번과 마샤가 피아노 치고 있던 장면, 거리의 악사 등이 등장하는 데 이 음악성은 역시 과거 잃어버린 문명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중심적 요소이다.

이러한 인간다운 과거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그에게 셀리호프가 장작을 돌려주라고 찾아온다. 그는 맘모스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차를 주려고 하는 마르틴에게 샴페인을 달라고 하는 셀리호프는 마르틴이 동굴에서 생존을 위해 장작을 구하려고 하는 모습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모습으로 보여진다. 이는 오베르뜨이쉐프처럼 그 역시 겨울이라는 시대와 이 동굴 속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셀리호프가 떠나고 마르틴의 모습은 분열의 극대화의 모습을 보인다.

 

동굴 속은 아직 어두웠다. 점토같고, 싸늘한, 앞이 보이지 않는 마르틴 마르티느이치는 동굴 속에 홍수 때처럼 흩어져 있는 여러 가지 물건에 둔탁하게 부딪혔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팔과 다리. 그것들을 올리고 내리는 데에는 몇 개의 사슬과 윈치가 배의 지주처럼 필요하다.

 

마르틴은 기계적인 모습으로 변하며, 죽음을 암시하듯 점토같고, 싸늘하게 변한다. 인간이 흙으로 빚어졌다는 성서적인 상징으로서의 점토는 그의 죽음을 예견하는 상징으로서 쓰인다.

그 후 마샤는 마르틴에게서 독병을 받아들고 그들은 예전에 보았던 달이 있는 곳으로 산책을 나가지만 그 곳에는 달이 없다.

 

아니 , 달은 없었다. 낮고 어둡고 황량한 구름은 둥근 천정과도 같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의 거대한 동굴, 고요한 동굴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달은 그들에게 있어서 따뜻했던 추억의 상징이자 미래의 희망이다. 그러나 그 달은 이미 그 어디에도 없고 동굴과 같은 하늘로만 남아, 동굴에서 더 이상 죽음 외에는 도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다.

 

2) 마마이

 

‘마마이’는 1300년대에 러시아를 침입했던 몽고 따따르 족의 여러 부족들 중 하나의 부족 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이 황제는 1380년 꿀리꼬보 전투에서 모스크바 대공인 드미뜨리 돈스꼬이에 굴복하고 만다. 그러나 마마이로 대표되는, 러시아 역사에서의 몽고족은 파괴, 황폐화, 학살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뾰뜨르 뻬뜨로비치 마마이로, 몽고족의 마마이 황제와 뻬쩨르부르그를 만든 뾰뜨르 대제가 공존하고 있는 이름이다. 즉 동물스러운 본능의 마마이와 합리주의로 대표되는 서구주의를 지향한 뾰뜨르 대제라는 양면적인 이름을 의미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마마이는 1300년의 마마이, 1917년의 마마이라고 불리운다. 각각의 이 연도들은 러시아의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던 시기로서, 이 작품에서는 몽고족의 야만성과 피를 부르는 혁명의 이미지를 마마이에게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10살의 곱슬머리 소년과 40살의 대머리 소년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이러한 호칭들은 전자의 야만적이며 파괴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책을 좋아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펜을 좋아하는 인간다운 모습의 이미지를 마마이에게 부여한다.

저녁마다, 밤마다 뻬쩨르부르그에는 더 이상 집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6층짜리 석조 선박들이 있다. 선박은 석조 파도를 타고 다른 고적한 6층들의 세계들 속에서 하나의 고적한 6층의 세계를 형성한다.<...>석조 선박 40호의 승객들은 저녁마다 지도에는 라흐찐스끼 거리라고 표시된 뻬쩨르부르그 대양의 한 지역을 질주한다.

 

마마이가 살고 있는 곳은 뻬쩨르부르그 밤의 대양의 석조파도를 떠다니는 6층의 석조선박이다. 늪 지역을 바위로 메꾸어 세운 도시가 뻬쩨르부르그임을 상기해볼 때, 뻬쩨르부르그의 건물들은 물 위의 석조건물임을 알 수 있다. 물 위에 돌이 떠 다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물을 돌로 다 메꾸어 버림으로서 조화가 파괴된 불안정한 도시로 변하였다. 자먀찐은 혁명 이후의 세계에 대한 모습을 이러한 도시에 투영하며, 이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밤의 대양에 포위된 시민들로서, 또한 석조 바다 위를 질주하는 석조 선박 속에 있는 것으로서 치환시키고 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특정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 이미지는 등장인물이 출현할때마다 반복되어 이미지의 인상을 남긴다. 말라페예프 오십은 안경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안경은 지식인이라는 러시아 문학의 전통 상징이다. 그는 안경을 통해 존경의 수준을 정한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지식인이 아니다. 그의 전직은 수위였다. 그는 이 석조 선박의 위계질서에 잘 적응하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마마이를 만날 때에 높은 위치의 교육자처럼 그의 안경은 코 끝에 있고, 코가 큰 뮐리니끄 동지를 만날 때에는 방어하듯 바싹 당겨진다. 그리고 선박의 선장, 즉 집의 전권대표인 옐리세이 옐리세이치를 만날 때에 오십의 안경은 높이, 이마까지 올라간다. 즉, 오십에게 있어서 마마이는 가장 낮은 층위에 있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옐리세이는 가장 높은 층위에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권력있는 옐리세이는 구부정한 모습의 반복된 이미지로 나타난다. 아틀라스 산맥으로 에르미타쥬의 처마를 70년 동안 지탱해온 인물이다. 그는 모피를 입고 있는데, 구부정한, 가죽옷의 인상착의는 그를 원시인 이미지로 보인다. 그러한 원시적인 그가 이 석조선박의 최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마이의 아내는 마마이에게 수프를 먹게하고, 휴식을 취하며 잠을 청하는 모습만으로 나타난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들은 양육과 부다의 이미지로서 반복된다. 마마이의 아내와 마마이의 관계는 마치 모자관계로 묘사되고 있다. 마마이의 아내는 마마이를 뻬쩬까라고 부르는데, 이는 마마이라는 몽고족의 이미지보다는 뾰뜨르의 애칭으로서, 지식인의 마마이로서 보고 있음을 나타낸다. 마마이에게 있어서 그의 아내는 정감있는 인간다운 인물이다.

마마이가 살고 있는 이 배에서 검열이 예고된다. 책을 좋아하는 마마이 역시 4200(루블)을 훔친 것을 숨기고 있는, 그래서 검열을 두려워하는 인물이다. 책을 좋아하고, 특히 옛날의 것들을 추억하는 인간적인 마마이였지만, 돈을 뺏기고 싶어하지 않는,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한 마리의 짐승, 이 되버리고 만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사각판 밑에 숨긴 돈을 쥐들이 갉아 먹는 것을 보고는, 잔인하게 쥐를 살해하는 모습이 바로 이러한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러한 마마이의 모습은 1917년 혁명을 일으킨 지식인들에 대한 메타포이다. 그들은 책읽기를 좋아하는 마마이처럼 합리주의를 지향하는 인물들이었으며, 오십과 같은 불완전한 지식인이 무시하는 잡계급 출신들이다. 그들도 마마이의 아내처럼 정감있는 가족들이 있다. 그러나 마마이가 훔쳐서 빼앗기지 않으려는 4200이라는 돈처럼, 지식인들 역시 혁명이후 갖게 된 이 작품에서 돈으로 상징되는 그들의 욕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지식인의 모습을 버리고 네 발 달린 동물로 변하여 잔인하고 파괴적인 살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즉, 혁명 이후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지식으로 억제할 수 없는 원시적인 인간의 본능을 노출시키는 모습의 형태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의 표현기법은 색채나 소리, 이미지를 갖게 하는 것외에도, 고도의 생략된 어투로서 묘사하고 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어스름한 승강구 어디선가에서 소리 낮춰 가만가만 대화하는 소리, 그리고 계단을 빠르게 뛰어가는 구두굽 소리, 아래에서는 선실회합, 입주자 클럽으로 향하는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 의자들의 아우성 소리, 누군가의 반사된 머리들, 보석반지를 낀 손가락들, 사마귀들, 나비 모양의 댕기들, 짧은 볼수염, 그리고 굽어진 아틀라스 산맥으로 담배 연기 구름에서 폭우가 쏟아졌다.

-책들, 현관의 덧신들, 삐삐팍스, 사모바르 통, 마마이 모자의 솜으로 된 안감, 침실 벽면에 걸린 푸른 기사 그림의 양탄자, 눈으로 젖은 채 반쯤 펼쳐진 우산, 상상 속의 친구인 골제바예프의 주소가 분명히 적혀 우표가 붙여진채 책상에 무심하게 버려진 봉투...

-정적, 등불 주위에는 하얀 날파리들, 돌연히 멀리서 긴 채찍으로 라이플 총을 발사하는 소리, 그리고 다시 정적, 날파리들, 맙소사, 현재 시각 4시,...

 

이러한 생략기법은 독자로 하여금 각기 나름대로의 상상을 하도록 유인한다. 사건을 빠른 템포로 진행하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마마이의 불안한 심리를 나타내주기도 한다.

검열이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옐리세이와, 숨길 것이 많은 이 석조선박 40호의 사람들. 혁명 후 변해버린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살길을 찾아, 자신의 욕망을 지키고자 불법을 저지르며 불안감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묘사는 그래야만 하는 생존의 당위적인 면을 보여준다기 보다, 이 석조선박 삶의 시스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리고 기괴하고 낯선 도시 뻬뜨로그라드에서 승객들은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하고 있었다. 그곳은 이미 떠나서 표류한 지 1년이 지나고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인 뻬쩨르부르그와 무언가 닮았지만, 그렇게 닮지는 않았다.

뻬뜨로그라드라는 도시명의 시대적인 상징을 이용하여, 혁명이전의 사람들이 방황하고, 표류하고 있다는 직접적인 묘사를 통해 혁명 이후의 시스템의 오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 결론

 

자먀찐에게 있어서 문명의 도시는 마마이가 살고 있는 한밤중의 석조선박이며, 땔 나무 조차 없는 얼어붙은 추위속에 생존해야만 하는 동굴이다. 두 공간 모두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권리의 요구가 가장 비극적이고 비참한 형식으로 끝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컴퓨터와 고도의 전자 기계들이 인간을 대신하는 21세기 세계에 살고 있다. 어리숙하고 비정상적이고 불합리한 사고를 소유한 인간들이 냉대 받고, 마치 잘 프로그램화된 기계와 같은 인간들이 추앙받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기계는 합리와 논리를 근간으로 하기에 인간의 눈에 믿을 만한 것으로 여겨지고, 이에 반해 비논리적이고 감상적인 인간은 인간의 눈에 원시 하등동물로 비쳐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희망적인 것은 기계들은 인간의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사고와 행동, 그리고 완벽한 프로그램의 틀을 깨부수는 따스한 사랑의 감정을 결코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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